반일감정 선동해 정파적 이득만 노리는 정치
반도체-전자제품-자동차, 기술로 이긴 기업들
얼마 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앞에 서 있던 아빠와 초등학생 정도의 아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다. 아빠는 길에 있는 일본차를 가리키면서 번호판의 앞자리 숫자가 세 자리인 것은 불매운동이 있는데도 일본차를 구입한 것이라고 아들에게 가르쳐주면서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이었던 게 2019년이었으니 이제 3년이 지났다. 당시에 번호판의 앞자리가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준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친일파라고 판별하고 이를 초등학생 아들에게까지 전수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린 아이에게 적개심 내지는 증오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불매운동 이후 일본차의 입장을 금지하는 골프장도 생겨났고 뒤 유리창에 일본차는 양보해주지 않는다고 써놓고 다니는 차도 있었다. 심지어 주차된 일본차의 보닛에 페인트로 욕을 써놓고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불매운동은 2019년 일본이 한국으로 수출되는 부품 및 소재를 규제하면서 촉발됐다.일본은 우리 대법원이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에서 배상판결에 이어 자산 압류 및 매각명령을 내리자 수출규제로 맞대응한 것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과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해오더니 수출규제로 우리 경제를 타격을 주려는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노는 한국 사람이면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나 표현의 차이를 근거로 친일파로 낙인찍고 우리끼리 싸우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싶다.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반일정서는 정치권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방을 친일세력으로 몰아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끌어내면서 선거에 활용하는 것이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는 특정 정당의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연구원에서 이러한 한일갈등이 선거에 호재라는 취지로 작성한 대외비 보고서가 유출되어 파문이 일었다. 당시 연구원장이 사과했지만 소속의원들 중에는 반일 대 친일의 구도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그 전략이 주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수시로 상대방을 친일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치권은 반일감정을 내부적으로만 이용할 뿐, 실효적으로 일본을 이기지는 못했다. 대조적으로 경제계는 이성적으로 현실적인 극일을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본을 벤치마킹해서 일본이 앞서가던 반도체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달성했다. 과거에는 해외 백화점에서 일본가전제품에 밀려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우리 전자제품이 이제는 일본제품들을 그 귀퉁이로 밀어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 자동차의 모델을 똑같이 생산하면서 기술이전을 받다가 이제는 미쓰비시를 저 아래로 밀어내고 세계 3대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하고 있다. 기술을 이전받는 것이 굴종적이라고 해서 죽창가만 부르고 있었으면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성과이다. 한신(韓信)이 불량배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 나온 치욕을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고 한다. 만약 그가 잠깐의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불량배를 죽였더라면 한(漢)나라를 세우는 업적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인들도 과하지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극일을 이루어 내고 있으니 박수를 받을 만하다.
과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을 2류, 관료를 3류, 정치를 4류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아들에게 친일파를 판별하는 요령을 가르쳐서 우리끼리 눈을 부라리면 4류 정치인들의 선동에 휘둘리는 것이다. 불편해도 이웃국가들과 공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실력을 키워서 강해져야 당당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해주면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