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현의 종횡무진]중대재해처벌법은 법의 기본 원칙을 중대하게 침해했다

글 · 조남현 시사평론가 현존하는 산업안전법 위의 옥상옥 처벌법 '입법의 범위를 초과' 의도적 재해를 처벌한다고? 민사법으로 다뤄야할 사안을 형사법으로

2022-03-24     매일산업뉴스
윤석열

우리는 법의 지배(rule of law) 아래 살고 있는가. 우리가 법(法)이라고 했을 때 그 법은 일반적인 규칙이어야 한다. 이 일반적인 규칙은 세세하게 미리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제정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그의 명저 <노예의 길>에서 “법의 지배는 입법의 범위에 대한 제한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이에크는 “법의 지배는 입법의 범위를 형식적 법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종류의 일반적 규칙들로 제한하며, 특정한 사람들을 직접 목표로 둔 입법이나 혹은 누구든 그와 같은 차별을 위한 목적으로 국가의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입법은 배제한다”고 했으며, 심지어 “그래서 특별법(particular enactment)은 법의 지배에 손상을 입힌다”고까지 역설했다.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의 문제점에 대해 그간 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이 법이 하이에크가 말하는 일반적인 규칙으로서의 법이 아니라는 점, 즉 자유사회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은 없었다. 비단 중처법 뿐 아니라 부작용만 초래한 임대차보호법 등 허다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지만 대개의 경우 법 아닌 법이다. 

도대체 산업안전보건법이 있음에도 중처법이 또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옥상옥이다. 그런 점에서 중처법도 일종의 특별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의 지배에 손상을 주는 법이라는 의미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지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제3차 중대재해 예방 산업안전 포럼’을 연 것은 중처법이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말해 준다. 이동근 경총 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중처법 시행 이후 정부 당국의 수사 방향을 보면, 사고 발생 직후 대표이사를 입건하는 등 엄정수사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며 “법률이 명확하지 않아 재해 원인과 책임소재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가 중처법을 너무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는데, 점잖게 말해 ‘우려’이지 까놓고 보면 통제사회에 대한 ‘저항’이나 다름없다. 

조남현

지난 22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경제 6단체장의 오찬 간담회에서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이 “중처법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다”고 하소연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중처법의 희생자가 될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물론 대기업들도 초긴장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래도 사고 개연성에 대한 대처에서 중소기업들이 취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처법의 가장 큰 문제는 기업인들의 기업 할 의욕을 위축시키고 꺾는다는 점이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언제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니 누가 교도소 담장 위를 걸으려 할 것인가. 그래서 하이에크가 법의 지배를 입법의 제한이라고 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입법의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민사법으로 다루어야 할 대상을 형사법으로 몰고 갔다는 점이다. 아니 어떤 경영자가 중대 재해를 원하겠는가. 의도적으로 재해를 일으킬 사업주나 최고 경영자는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재해로 인한 피해자 구제는 당연히 민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치가 그러함에도 민사상 손해배상과 함께 형사처벌까지 받게 하는 것은 이중처벌이다. 이건 국가의 횡포이자 폭력이다. 거기다가 처벌도 너무 가혹하다. 검찰이 마련한 중처법 양형기준에 따르면 법 위반 시 최고 징역 30년, 재범 시 45년까지 구형할 수 있다 하니 무서워서 기업경영을 꿈이나 꾸겠는가.    

물론 최고형 구형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형 재해가 발생했을 때 최고형 구형을 피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개연성을 떠나 기업인들은 그런 공포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 어처구니없는 법으로 인하여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정부 부처나 기관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도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기소권을 갖고 있어 양형기준까지 마련한 검찰은 물론이고 경찰, 고용노동부, 법무부, 환경부, 심지어 지방자치단체까지 서로 조사하겠다고 난리인 게 현실이고 보면 중처법은 국가 폭력의 완장만 대거 만든 꼴이다.  

중처법 사태를 보면서 도대체 입법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이 무엇인지, 입법의 한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법에 대한 철학이라고는 아예 없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처법은 하나의 사례일 뿐 여론에 등 떠밀려 그저 단순 무식하게 법이라는 이름으로 법 아닌 법을 대량으로 쏟아내 온 자들이야말로 나라에 중대 재해가 아니고 뭐냐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중처법 앞에 있는 산업안전보건법만 대충 봐도 우리나라의 법의 실정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법 제2조(정의) 11항은 “‘건설공사’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공사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른 건설공사, ‘전기공사법’에 따른 전기공사 등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이는 곧 건설공사가 다섯 가지 외에는 없다는 전제하에 규정한 것임을 뜻한다. 기술의 발전이나 소재의 발전에 의해 앞으로 얼마든지 다른 건설공사가 나타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 그때 법을 개정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법을 개정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반적인 원칙으로서의 규칙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서두에서 말했지만 일반적인 규칙은 세세하게 미리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때그때 고쳐야 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이라 할 수 없다. 입법자들이 이러한 최소한의 법의 원리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학계도 문제다. 왜 이 터무니없는 현실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가. 물론 자유와 법치주의를 설파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현실의 법을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아 왔다. 그런 점에서 이 나라에 지성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국회의원들이야 무지해서 그렇다 치자. 법학계나 철학계는 왜 두 손 놓고 있는가. 학계나 정치권이 이 모양이니 일반 대중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