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의 책무인 공공의 이익이란 게 있기는 한가
공영방송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전제하는게 넌센스
지금 KBS는 비상 상태다. TV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분리 징수토록 하는 방안이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KBS 2TV는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KBS 자신은 물론 야당과 범 진보 좌파 세력까지 나서 수신료 분리 징수를 반대하며, 심지어 단식까지 불사하는 야당 의원도 있다. 이러한 구도, 즉 정부 여당과 보수 우파 진영은 분리 징수, 야당과 좌파 진보세력은 분리 징수 결사반대를 주장하는 지금의 형국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 정부 여당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들고나온 것은 KBS의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는 윤석열 정권이 KBS를 손보려 하는 게 KBS 길들이기를 위한 것이라고 공격하지만 그건 틀린 진단이다. 지금까지 KBS는 보수 정권에 의해 길들여진 적이 없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저항하고,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대변해 온 게 그간 KBS의 행보였다. 정치권력도 어찌할 수 없으니 수신료 분리 징수를 통해 KBS에 타격을 가하려는 게 윤 정부의 속셈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수신료 분리 징수는 정공법이 아니라 일종의 꼼수라고 보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수신료 징수 방법 갖고 왈가왈부할 시기는 지났다. 근본적으로 공영방송을 유지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따져봐야 할 때다. KBS는 물론 MBC까지 공영방송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노영방송(노조가 장악한 방송)으로서 좌파의 가치와 좌파의 눈으로 뉴스를 재단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를 논할 때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공영방송의 책무인 공공의 이익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인가. 흔히 공공성을 얘기하는데 공공성이라는 게 무엇인가.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알겠지만 그 현실적‧실천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 설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누가 판단할 것인가. 누군가가 판단한다고 할 때 모두가 거기에 동의하고 공감할까. 이런 근본적인 물음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을 놓친 채 변죽만 울리다가 흐지부지되었던 게 저간의 사정이다.
공정성도 마찬가지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공정함은 존재할 수 없다. 예컨대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할 때 이를 공정한 보도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공정한 편파 보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공정성은 어떻게 가릴 수 있는가. 광화문 촛불시위 군중의 수가 실제로는 몇만 명인데 ‘100만 촛불 집회’라고 보도했을 때 이에 열광하며 환호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공정성에 아무 흠집이 없어 보이지만 촛불시위에 부정적인 사람은 과대 포장으로 볼 것이다. 이렇듯 공정성도 보는 사람의 가치와 입장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공성이나 공정성은 누가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억지로 무슨 위원회를 만들어서 판단하려 한다면 그건 발상부터 난센스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한 번도 문제 제기가 없었다. 아마도 문제의식 자체가 없지 않았나 싶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사회가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깊은 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정성과 공공성은 무슨 위원회나 정부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방송도 그냥 소비자의 선택에 맡겨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공영방송 자체를 없애 모든 방송을 민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물론 국가가 운영하는 방송 하나쯤 있을 수는 있다. 이를테면 EBS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EBS조차도 시장에 맡겨서 충분히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몇 번인가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우리 사회를 열광시킨 바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사례다. 그런데 정말 정의란 무엇일까? 샌델은 장황하게 여러 가지 상황을 늘어놓으며 주요 철학적 사조의 정의를 설명하는데,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주의 입장에서의 정의다. 우리 사회가 그런 샌델에 열광한 것은, 따라서 자유주의보다 공동체주의의 경향성이 짙음을 말해준다. 공동체주의자들이 곧잘 주장하는 게 바로 공공성인데, 그런 면에서 공공성은 정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공공성이라는 것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정의나 공공성 둘 다 자의적인 가치판단이다. 따라서 하나의 가치관에 의해 규정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그런데 공영방송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전제하고 공정성을 논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공영방송은 없어도 된다. 아니 있으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없애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방송이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존재 가치를 증명받게 해야 한다. 시장에 맡기라는 말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논란도 필요 없고, 경영이 방만하다느니 억대 연봉자가 많으니 어쨌느니 따질 이유도 없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혹 시장에 맡기면 교양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콘텐츠 생산이 위축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할 수 있겠지만(실제 과거 그런 주장도 많았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논리라면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방송은 어떻게 생겨나서 유지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급(?) 콘텐츠의 수요도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콘텐츠의 질이다. 상품의 질이 높으면 얼마든지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이제 정답 없는 문제를 놓고 싸우는 건 그만했으면 한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KBS 수신료 문제로 논란을 벌이는 건 사회적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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