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 들자고 선동만 하는 자들에겐 눈 감고 싶은 진실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가 아니었으면 독도를 못지켰다
한국과 일본이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추가시간 6분의 희비가 엇갈렸다. 한국이 호주에 1대0으로 끌려다니다 후반 추가시간 6분 경에 황희찬의 페널티 킥 성공으로 기사회생한 반면 일본은 90분동안 1대1로 종료돼 연장으로 넘어가기 직전 후반 추가시간 6분 경에 이타쿠라의 실수로 페널티킥을 허용해 4강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아쉽게도 결승에서의 한일전은 이렇게 무산됐다. 역대 한일전은 언제나 날카로운 칼날에 손가락을 스친 기억처럼 날선 느낌으로 추억된다. 물론 이겼던 경우는 뜨겁게 쏟아낸 숨결도 함께 떠오르지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었을 때의 일이다. 해방후 태극기를 달고 치른 첫 번째 한일전이자 첫 번째 도쿄대첩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지역 예선은 홈 앤 어웨이로 치러졌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를 침략했던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오는 꼴은 용납할 수 없다"며 경기 자체를 거부했다. 이유형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은 전쟁 후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업에 뛰어든 선수들을 불러모아 선수단을 구성한 후 패하면 대한해협을 헤엄쳐서 건너오겠다는 각서를 쓰고 대신 2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르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간 국가대표 축구팀은 경평축구의 주역 북한 출신 최정민 선수의 맹활약에 힘입어 1차전을 5대1로 대승한 데 이어 2차전을 2대2로 비겨 아시아 대표로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도쿄대첩’ 대승의 배경에는 재일교포들의 피눈물 나는 지원과 함께 선수단의 결기를 이끌어낸 이승만의 벼랑끝 압박도 한몫했다. 이승만은 일본에 대해 자신이 세운 원칙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고수했다.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국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5년간 받았기에 동질성이 있어서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할 것”이라고 착각한 미군이 이승만에게 “미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당장 일본군의 협력을 받자”고 하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일본군부터 물리치고 볼 것"이라고 응답해 미군을 당황하게 했다.
대일 외교 정책에 있어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은 ‘독도 수호’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을 통치하게 된 미 군정은 1946년 한반도와 독도를 포함한 부속 도서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영토에서 분리하면서 연합군 최고사령관각서 677호와 1033호를 발령해 일본 선박에 대해 독도 인근 해역 12해리(22.2km) 내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이 각서의 효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1년 9월 미국이 일본의 주권 회복을 공인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조인함으로써 일본이 다시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할 것이 명약관화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정식 발효되는 1952년 4월을 3개월 남기고 전격적으로 ‘평화선’을 선포했다.
이승만은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였으나, 20배인 60해리를 안전선으로 선포했고 이는 당대 통용되던 국제법을 어긴 조치였다. 전쟁 중이지만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기에, 선포 한달 뒤인 2월 12일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무시했다. 그해 4월 주권이 회복되자 일본은 독도에 무단 상륙해 1948년 미 공군의 독도 오폭으로 숨진 조선인 어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비를 바다에 던져 버렸고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전시 긴급명령으로 포획심판령을 제정하고 ‘평화선을 침범해’ 조업을 하던 일본 어선을 나포한다. 그렇게 시작된 대한민국 해경에 의한 일본 선박의 나포는 1965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총 328척에 이르렀고 3929명의 일본인이 부산, 거제도, 제주 한림항 등에 설치된 법무부 형정국 형무소에 구금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44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
일본은 구금된 일본인들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벌였고 이승만이 요구한, 불법체류 혐의로 구금된 재일한국인의 석방 및 영주권 부여와 석방되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선을 침범하여 체포되었음’이란 문구가 적힌 문서에 서명하게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도 평화선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지켜낸 독도를 애매모호한 대일 정책으로 흔들리게 한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하고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독도를 공동관리구역(중간수역)으로 만들고, ‘섬(Island)’이 아닌 ‘암초(Rock)’로 표기해 1999년 1월 6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일본은 이 협상이 이뤄지기가 무섭게 본격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도 2021년 10월 25일자 ‘독도 평화선만은 이승만의 업적이었건만’ 제하의 칼럼에서 독도에 대한 이승만의 공과 김대중의 과를 인정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소개하면서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조선일보 2월 4일자 ‘문재인, 책으로 尹정부 비판 “독도 지킬 때 진정한 주인”’ 제하의 인터넷판 기사에 따르면 문재인은 지난 2일 페이스북으로 독도 관련 어린이용 그림책 ‘독도 바닷속으로 와 볼래?’를 추천하면서 “우리가 독도를 더 알고,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꾸고 지킬 때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는 문재인이 독도 관련 책을 추천한 것은 최근 정부에서 독도 표기와 관련해 실수가 이어졌던 상황을 염두에 둔 행보로 풀이된다고 덧붙였다.
문재인이 그렇게 독도를 사랑한다면 어린이들에게 그림책만 권할 것이 아니라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건국전쟁’을 관람할 것을 권해야 한다. 지난 70년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독도를 지켜내고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이승만과 건국 1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을 알 수 있게 조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저 독도를 정쟁의 도구로 삼아온 사람들에게는 눈 감고 귀 막고 싶은 진실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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