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주도할 명분과 영향력 잃자 갈팡질팡 갈짓자 행보
경교장 찾아온 대만 공사 유어만에게 인민공화국 예상
올해는 6‧25 74주년이다. 매년 6‧25를 맞을 때마다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빚어진 민족사 최악의 비극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며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각종 콘텐츠가 방송이나 언론 매체를 채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조명되지 않은 게 있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에 연막을 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침을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특히 김구는 그 주역이었음에도 김구가 그런 이적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금기시해 왔다. 강고한 김구 신화 탓이며, 한국 사회의 위선 탓이기도 하다.
1947년 11월 30일 김구는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면담하고 나온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만일 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선거가 불가능할지라도 후일에 실시할 조건으로 의연히 총선거 방식으로 정부 수립을 하여야 된다. 이는 단독정부가 아니며 법리상으로나 도의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 정부일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도 결국 나의 주장하는 바와 동일한 것인데 세인은 이를 오해하고 있다.”
1주일 전만 해도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김구는 12월 4일에도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 나도 이 박사를 존경하는 한 사람이므로 양인 간에는 본래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12월 17일에는 “최고 영도자 이승만 영사(領士)와 김구 선생이 우선 남한에서 총선거를 급속히 실시하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으므로…”라는 보도도 있었다. 그랬던 김구가 12월 22일 단독 정부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태도를 돌변한다. 김구는 왜 이렇듯 갈지자 행보를 보였을까.
김구의 이와 같은 갈팡질팡하는 행보는 그의 정치적 입지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김구는 당시 정치적으로 거의 주도권을 잃고 있었다. 환국할 때만 해도 중경 임정 주석이라는 후광이 그를 거물로 만들었고, 곧바로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그는 좌우 진영을 망라해도 이승만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은 얼핏 보아 반탁운동의 성공인 듯 보였지만 거꾸로 반탁운동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유의미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건 다시 말해 김구가 정국을 주도할 명분과 영향력을 잃게 되었음을 뜻한다. 반탁운동의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타오를 때 분명히 김구는 정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불길이 사그라지자 김구의 영향력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게 지향점이 없었던 반탁운동을 벌인 김구의 한계다.
그런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장덕수를 암살한 범인들이 김구의 직간접적인 지시를 받은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김구는 환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잖아도 송진우와 여운형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는 강한 의혹을 사고 있던 터에 장덕수 암살 사건에마저 연루되자 김구는 정국 주도권은커녕 정치 생명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비상구가 필요했다. 그가 스스로 이승만을 찾아가 뜻을 함께한다고 밝힌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구는 그냥 스러져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장덕수 암살 사건이 한독당 인사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이 밝혀지자 조소앙은 정계 은퇴를 발표했지만, 범인들에게 암살을 지시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던 김구는 정치 무대에서 내려갈 의사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이승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손길’이 다가왔다. 바로 김일성의 직계 남파 간첩 성시백을 통해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라는 김일성(사실은 해방 이후 북한을 주물렀던 소련 점령군 스티코프 정치위원)의 구상이 비서 안우생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김구로서는 ‘신의 한 수’로 여겨졌을 법하다. 물론 그는 여러 사람 중 한 사람(one of them)으로 참석하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남북요인회담을 요구했다.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는 1948년 4월 20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의 일환으로 북한군 열병식이 열렸다. 김구는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소련제 탱크와 야포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귀환한 김구는 7월 11일 경교장으로 그를 찾아온 중국 공사 유어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어봤자 이내 무너질 것인데 내가 왜 거기에 참여하느냐고 말한 셈이다.
김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5월 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미소) 양군 철수 후 어떤 험난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동족상잔이 없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김구는 정말 동족상잔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그랬다면 그가 유어만에게 ‘단시간에 여기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는 전쟁을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속내를 감추고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침에 연막을 피운 것이다. 그건 대한민국과 그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그를 통일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씁쓸한 6‧25 74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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