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유관순을 이화학당에 보내준 사애리시
“조선을 밝힐 등불이 되라”고 응원한 김란사
주검을 수습해 장례식 치러주고 안장한 월터
3·1 운동 하면 우리는 한복 치마 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손에 든 16살 소녀, 유관순을 떠올린다. 감옥에서 순국한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조국이란 무엇인지, 조국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나이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되묻게 한다. 심지어 일제에 항거한 지사들은 유관순보다 더 어린 12살의 한이순, 안정명과 9살의 김선옥도 있다.
해마다 3·1절이 되면 잊지 말아야할 사람은 유관순 만이 아니다. 유관순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독립정신을 함양케 한, 유관순의 첫 스승 사애리시((史愛理施)도 그중 한 사람이다. 캐나다 선교사로 전도를 위해 1903년 조선의 땅을 밟은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그의 본명은 앨리스 해먼드 샤프인데 한국 이름인 사애리시로 더 알려졌으며 애칭인 '사(史)부인'으로도 불렸다.
그는 1914년 충남 천안 병천면 지령리 교회에서 12살의 유관순을 만난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홍호학교를 운영한 교육자였다.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빚을 지게 되는데 그를 갚기 위해 그 고장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일본인 고마다에게서 빚을 내게 되고 그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집을 빼앗기게 됐다. 그 때문에 유관순은 교육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에 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유관순을 만난 사 부인은 첫눈에 그의 총명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길로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고 공주로 데려와 자신이 세운 충청도 최초의 근대학교인 명선학당에서 1년간 가르친후 자신이 교사로 있던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시킨다. 유관순은 1918년 4월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 고등보통학교 1학년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2학년으로 진급할 시점에 3·1운동에 참가했다.
사애리시는 한국이란 땅에 살고 있는 여성들을 개화하기 위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은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요 어머니다. 39년간 공주와 충남지역에 유치원 7곳, 여학교 9곳 등 20여 개 교육기관을 설립한 그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던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야학을 개설하기도 했다. 1913년 당시 사애리시를 통해 배움을 이어간 한 할머니는 “선교사님이 우리를 바꿨어요. 선교사님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여자가 되었어요”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는 행방불명된 독립군 아버지를 둔 오애리시를 입양하여 키우며 박한나 권사와 함께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고 독립운동가 김현경, 광복 후 자유당 정부에서 상공부장관을 지내고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 많은 여성 인재들을 영명여학교에서 길러내 한국의 여성사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시켰다.
사애리시는 한 회고문에서 “한국에서 봉사한 39년은 정말 무척 만족스럽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가 세운 우리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교육받고 주일학교와 교회에서 훈련받아 전도사, 교사, 전도부인, 의사, 간호사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고 한국에서의 삶을 회고했다.
사애리시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라일락꽃이 피는 한국의 봄을 사랑했다. 그는 같은 선교사인 로버트 샤프와 결혼후 3년만인 1906년 사별했다. 그는 영명학교 뒤 언덕에 묻힌 남편 무덤쪽을 매일 아침 돌아보며 오늘은 어느 지방으로 가서 교육활동과 선교사업을 할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후배 선교사였던 안나 채핀은 사 부인의 한국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23년 미국의 친구들이 사준 포드 자동차를 타고 정말 멀고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만나고 봉사하기를 즐겼다. 특히 그녀는 한국의 산을 뒤덮은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하얀색 라일락꽃의 풍경을 정말 좋아했다. 그곳의 모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다.”
1940년 일제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그를 추방했다. 사 부인은 미국으로 건너가 말년을 보내다 1971년 닉슨 대통령과 후에 대통령이 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축하 편지를 받으며 100세 파티를 가진 후 1972년 101세에 파사데나의 선교사요양원에서 소천했다. 1938년 공주 영명학교에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사애리시 선교 기념비’가 세워진지 81년만인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유관순과 앨리스, 로버트 샤프 부부의 만남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2020년 5월 6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고 부탁한 이화학당 교감 김란사(1919년 3월 10일 순국)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직접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해 학교에 안치한 후 몸소 수의를 입히고 이튿날 장례식과 이태원 공동묘지 안장까지 주도함으로써 유관순의 마지막 스승이 된 이화학당 체육교사 지네트 월터도 함께 기억해야할 ‘스승’들이다.
열사의 삶, 지사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범인(凡人)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용기와 남다른 애국심이 필요하고 그래서 더욱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그에게 길을 열어주는, 그의 꿈을 함께하는, 그의 등불이 되어주는 그런 삶도 역시 조명 받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