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해전사'와 조정래 '태백산맥'이 획책한 역사의 전복
마오이즘 숭배하고 미군을 점령군으로 세뇌시킨 역사전쟁
이종찬 광복회장이 올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 불참하며 야당들과 별도의 행사를 치른 것은 알려진 그대로다. 이 회장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뉴라이트’라고 낙인찍으며 마치 윤석열 정부가 건국절을 제정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에서 김 관장 인사(人事)가 이루어진 것인 양 주장했다. 그는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뉴라이트’가 마치 악한 집단이라도 되는 듯 저주를 퍼부으며 낙인찍기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건 그가 한국 근·현대사 뿐 아니라 7~80년대라는 최근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점을 스스로 드러낸 거나 다름없다.
지난 칼럼(2024년 8월 15일 자)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뉴라이트’는 낙인찍기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런데도 역사에 무지한 대중은 이러한 낙인찍기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 마치 왜곡된 역사 인식을 가진 것인 양 생각하기 쉽다. 김형석 관장과 윤석열 정부조차 어불성설의 낙인찍기에 대해 “나는(또는 그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변명하는 지경이니 일반 대중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 회장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는 대한민국사를 둘러싼 역사 전쟁에 끼어들었다. 그가 복무한 전두환 정권 시절인 80년대에 촉발된 이 오랜 역사 전쟁에 대해 그는 무지해 보인다. 그의 무지는 그가 권력을 누리고 있던 그 시기 좌파 수정주의 사관에 의해 한국 현대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몰랐음은 물론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인식이 어떻게 확산했는지도 몰라 한 번의 고민도 해보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 전쟁의 싹은 80년대 이전 시기에 이미 움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에 이미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로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인식이 있었고, 7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이 유입되어 있었다. 심지어 마오이즘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의 일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중국에 재앙을 초래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긍정하는 인식을 담은,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다고 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학가, 특히 운동권에는 필독서로 여겨질 정도였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이즘에 토대를 둔 변혁운동사상이 급속히 확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80년 광주사태를 계기로 반미주의가 생겨났으며,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더해 배타적 민족주의가 대학가와 재야를 중심으로 확산해 나갔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일본에 대해서 보다도 더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민족주의가 운동권을 지배했다. 이러한 의식 또는 정신세계에서 기존 역사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는 새로운 사조의 역사관이 등장했다. 바로 좌파 수정주의 사관이다. 그로 인하여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수정주의 사관에 의한 한국 현대사 재해석의 중심에 있는 저작은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시리즈 6권이다. ‘해전사’는 김일성 정권이 소련의 괴뢰로서가 아니라 자주적으로 성립했으며, 소련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된 북한 농지개혁의 본질을 외면한 채 그것이 마치 농민을 해방한 것인 양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얻은 농민은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 가졌을 뿐인 데다가 농지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농노 신세를 면치 못했음에도 ‘해전사’는 진실을 외면했다. 그뿐 아니다. 분단의 책임이 본질적으로 소련에 있었음에도 미국과 이승만에게 지웠고, 6·25 전쟁도 김일성 남침의 의미를 희석하며 민족통일전선과 제국주의의 충돌이라는 식으로 성격을 규정했다. 대한민국 탄생을 위한 1948년 5·10 선거를 파탄하기 위해 공산 세력이 일으킨 제주 4·3 무장 폭동은 민중항쟁으로 미화되었고,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부인되었다.
대중에게 ‘해전사’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건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다. 소설은 역사서와 달리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기에 대중에 미치는 영향과 파급력은 역사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더욱이 작가 조정래는 ‘작가의 말’에서 ‘태백산맥’이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증언과 확인을 거쳐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객관적으로 되살려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독자는 ‘태백산맥’을 단순히 소설로 이해하는 걸 넘어서 실제 역사로 이해했을 소지가 크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좌파 수정주의 인식이 일반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않아야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역사에 무지했던 탓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는 김구가 있다. 그가 유엔의 결의에 따라 치러진 1948년 5·10 총선거를 반대하며 평양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과 중도 좌파 세력이 모여 개최한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대한민국 탄생에 재를 뿌렸기 때문이다. 김구는 김일성 정권의 탄생을 돕는 이적행위를 저질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에서 김구는 통일의 화신으로 받들어지며 신화가 되어 있다. 김구 신화는 어처구니없게도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성격 지우기 위해 그가 무너뜨린 게 단순히 장면 정부만이 아니라 구체제였음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이룬 경제발전의 토대를 만든 이승만 정부까지 부인하며 김구를 부각했다. 그러다 80년대 이후 배타적 민족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김구 신화는 더욱더 강고해졌다. 김구 비판은 금기가 되어버렸다. 그에 반비례하여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하여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성립게 한 이승만에 대한 비난과 저주는 온갖 매체에서 일상이 되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우파 성향 연구자들의 김구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 게 그것이다. 하지만 김구 신화는 좀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김구 신화가 얼마나 강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 후인 1948년 5월 1일 김일성과 함께 북한군 열병식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소련제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위용을 보고 온 김구는 이후 그를 방문한 중국 총영사 유어만에게 ‘앞으로 3년 동안 북한은 가만히 있고, 남쪽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북한군과 같은 무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소련은 북한군을 가지고 남으로 밀고 내려와 이 땅에는 순식간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는 요지의 밀담을 나눴다. 머지않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인데 곧 무너질 대한민국에 자신이 참여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의미다. 유어만과 나눈 김구의 밀담은 유어만의 영문 보고서로 남겨졌는데 2009년 월간조선에 보도되고, 올 초 120만 관객을 끌어들인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폭로되었다. 하지만 김구 신화는 크게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리고는 급기야는 올 8월 15일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역사 전쟁의 또 한 줄기가 있다. 그건 한국인들의 노예근성 또는 노예 의식과의 전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인들은 여전히 일제 식민지 시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해방된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데도 일본에 대해 아직도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죽창가를 부르며 노골적으로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 약 5년전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라는 저작은 바로 해묵은 반일 노예 의식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구체적 역사 현실을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학술연구서다. 이에 대해 한국 역사학계는 학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해왔다. 이를테면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부인하는 주장이나 쌀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주장,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역사적 사실(fact)에 기초하여 반박하지는 못한 채 ‘말도 안 된다’거나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하는가’ 따위의 비학술적 비판이나 비난으로 일관해 왔다.
현재 진행형인 대한민국의 역사 전쟁은 사실과 허구의 싸움이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며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려는 측과 적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해 ‘역사는 당연히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측의 투쟁이다. 이러한 역사 전쟁의 본질을 대중 일반이 널리 인식할 때 비로소 역사가 가닥을 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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