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거조넌스? 미리 틀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생존하라
지원과 규제 없는 것 중 선택하라면 후자가 정답

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진흥이 우선 돼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규제보다는 진흥이 우선돼야 한다는, 이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 왜 뉴스가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가 규제 만능주의 국가임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지만, 뉴스일 수 없는 게 뉴스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규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말해 준다.
또 하나의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규제 혁파를 외치면서도 그들 자신이 규제를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의식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AI 거버넌스를 잘 만들어 가야 된다”는 이야기로 초점이 모아진다. 아직 생태계도 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버넌스’를 거론하는 건, 미리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생존하라는 말과 달리 들리지 않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지난 2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마련한 AI 현안 공청회에서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은 “지금 AI 정책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미래 경쟁력이 좌우될 것은 분명하다”며 “우리나라는 현재 AI 기술력으로 봐서 2군 수준으로 분류가 되고 있는데, 더 이상 뒤처지면 따라잡을 기회가 영영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고 절박함을 호소했다.

그는 대표적 우려 사항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 중인 플랫폼법과 내년 1월 시행될 AI 기본법을 지목했다. 특히 AI 기본법의 경우 ‘고영향 AI’에 대한 정의가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하위 법령을 제정하거나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고영향 AI와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이나 절차를 거치다 보면 AI 서비스를 적시에 출시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정책을 만드는 관료나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보다 정책의 반영인 법이 기업 활동 현장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더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기업인이다. 그의 우려는 그만큼 무게를 갖는 것이다. 박 회장은 AI 기본법의 하위 법령을 제정하거나 집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관료들의 주관적인 법 해석이나 임의적인 집행을 걱정하고 있다. 박 회장이 아니라도 이미 산업 현장에서 그런 경험을 했을 기업인들은 차고 넘친다. 그들이 괜스레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야생동물을 우리에 가두면 동물들은 거기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그건 곧 야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인간의 보호와 도움에 익숙해지면서 야생에서 발현되는 생존 본능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새끼 때 어미를 잃어 인간의 손에 의해 키워진 야생동물이나 과거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야생에 풀어 놓으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동물 보호단체 등이 새끼 때 보조해 키운 야생동물을 야생으로 돌려보낼 때는 상당한 기간 야생 훈련을 시키는 까닭이 그것이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산업 생태계는 야생의 초원과 다를 게 없다. 초원에서 펄펄 뛰며 스스로 생존하는 야생동물을 우리에 가두면 야성을 잃듯 산업 생태계에 우리를 치듯 어떤 틀을 만들어 기업들이 거기에 맞추어 생존하라고 하면 기업들은 야성, 곧 스스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창의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애당초 AI 기본법도 만들 이유가 없었을 수 있다. 생태계가 형성된 후 어떤 규칙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법을 만들어도 늦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게 순리라고 할 수 있다.
법은 큰 틀에서의 원칙만 정하는 선에서 그쳐야 하는 게 정도다. 미리 알 수 없는 미래의 세세한 상황을 예측하여 어떤 것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식의 입법은 반드시 부작용을 부를 수밖에 없다. AI 산업의 발전과 경쟁력을 위해 경쟁국과 같이 AI 기업을 지원하는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기업들이 외국 경쟁사들과 불공정 경쟁을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원하지는 못하더라도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만일 지원과 규제 없는 것 중 선택하라면 후자가 정답이다. 지원하되 규제한다면 지원하지 말고 규제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리 가이드 라인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접어야 한다. 그건 돕는 게 아니라 옥죄는 것이다. 제발 야생동물이 그러하듯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하고, 그러지 못하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어 죽도록 놔두는 게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길임을 정책 당국자나 입법자들이 꼭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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