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자유 보장되려면 국가의 통제 최소한으로 줄여야
평등을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추구하는 것은 기만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자유의 가치가 새삼 부각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자유에 대한 이해는 매우 낮다. 나아가 자유의 적들이 너무 많다. 자유의 적들은 자유의 가치를 왜곡하고 그릇된 이해를 광범위하게 확산해 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에 관한 한 황무지나 다름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기대를 모았지만, 올 신년사에서는 딱 한 번 자유를 언급했을 뿐이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자유는 선언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는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이며, 국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올해는 특히 그 중요성이 크다.
우리가 어떤 주의(ism)라고 할 때 선택해야 할 것은 오직 자유주의 하나뿐이다. 자유주의는 인류를 번영으로 이끈 유일한 사상적 기반이다.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인간을 해방해주었음은 역사가 웅변한다.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통해 풍요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을 바탕으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했다.
인류의 번영과 풍요는 교환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교환이 있었기에 분업과 협력이 가능했다. 그 교환은 자기 삶의 주인인 자유인, 즉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인간, 교환에 필요한 ‘내 것’, 곧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사적 재산과 그 처분에 대한 권리를 갖는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적 재산은 비단 물질적인 재화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노동력 또한 사적 재산이다. 그 노동의 교환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자가 아니면, 즉 노예라면 자기 몸을 갖고도 교환을 할 수 없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할 수 있을 뿐 스스로 어떤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을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유인이 된 지는 그리 얼마 되지 않는다. 자유는 자유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주창함으로써 세상을 설득한 선각자들에 의해 사회가 진화함으로써 주어진 것이다. 이는 곧 자유 사회로 진화하지 못한 국가의 사람들은 온전한 자유인의 삶을 누리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다른 가치나 사상에 속박당하거나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그 지경에 처해 있다. 자유의 적들이 너무 많다고 얘기한 이유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적은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 후에도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추종자들에 의해 내면화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아직도 마르크스의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론의 당연한 오류로서의 역사주의로 인류를 재앙에 몰아넣은 마르크스에 대한 찬양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도 여전하다. 사회학이나 철학을 한다는 일부 학자들이나 사이비 지식인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부 정치인들이나 정파가 오직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대중을 속이며 사회주의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곧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한다. 마치 자유와 평등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처럼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 대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두 바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모든 사회에서 평등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곤충의 세계에서도 평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등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이야기해 왔다. 사실 이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사기다.
솔직하게 말하자. 평등은 비록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긴 하지만 성취할 수 없는 목표다. 그런데도 그게 가능한 것처럼 주장한 사람이 마르크스였고, 그 산물이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가 실패할 운명이었음이 명백히 입증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평등을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추구하는 것은 기만이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 평등은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가 확장한다. 그것이 오히려 불평등을 최소화할 것이다.
자유는 구체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 말이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려면 국가의 통제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사명도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 자유주의 철학을 확고히 해야 윤 정부의 3대 개혁도 성공에 이를 수 있으며, 나라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윤 정부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노동개혁의 경우만 해도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푸는 것이 핵심이다. 그간 국가가 획일화한 기준으로 노동시장에 개입함으로써 기업(기업, 곧 법인의 소유주인 주주도 결국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과 개인 근로자 모두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낳아 왔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를 강조한 것은 적절하다.
이렇듯 우리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가치는, 거듭 강조하지만 자유다. 제3의 길 등 다른 길은 없다. 그래서 새해를 맞아 자유주의를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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